진(秦) 초대 황제
시황제 | 始皇帝
출생 | 기원전 259년 음력 1월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진나라에서 썼던 전욱력(顓頊曆)을 기준으로 이 달은 그레고리력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총 29일간이었다.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장양왕은) 시황을 진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낳았다. 生始皇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 生於邯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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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한단 영자초 사저 | ||
사망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향년 49세) 『사기』의 원문은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라 하여 음력 7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병인일이 없었고 6월, 8월, 9월에 있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는 병인일을 7월이 아닌 8월의 것으로 본 다음 그것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중문 위키백과에서는 홍범오행전의 "六月乙丑"을 근거로 사망일을 7월 11일로 기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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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사구 | ||
능묘 | 여산릉 | |
재위 | 6대 국왕 | 기원전 247년 7월 6일 음력 5월 26일 병오. 이 날에 장양왕이 죽었다. ~ 기원전 221년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재위) 26년, (중략) 왕이 말하기를 "태 자는 떼고 황 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라 부르고, 나머지는 논의와 같이 하라." 하였다. 제를 내려 "좋다."라 명하였다. 二十六年, … 王曰 "去泰, 著皇, 采上古帝位號, 號曰皇帝. 他如議." 制曰, "可." |
초대 황제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10년 9월 10일 |
성 | 영(嬴) 진나라 왕성. 여불위의 아들이라면 성은 강(姜)혹은 여(呂)이다. |
씨 | 조(趙)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
휘 | 정(政) 《사기집해》는 서광의 주석을 인용해 시황제의 이름이 “정(正)”으로 된 판본이 있다고 하면서, 송충의 주석에 따라 정월(正月, 음력 1월)에 태어나 '정'으로 지었다고 해석했다. 고대에는 '정'(正)과 '정'(政)이 하나의 글자로 혼용되었다. 일례로 '정'(正)과 '정'(政)의 동자(同字)적, 다의어적 성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대부 계씨(계손씨) 집안의 7대 영주였던 계강자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정(政)은 곧 정(正)이다”(政者, 正也), 즉 “정치(政)란 바르게 하는 것(正)이다”라고 말한 것. 시황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소수들은 원래 이름이 '정'(政)이고 '정'(政)의 앞 글자를 따서 아명을 '정'(正)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술했듯 진시황의 이름은 政인지 正인지 논란이 있다. 일설로만 전해지는 이름이지만, 진짜로 시황제를 '조정'(趙正)이라고 부르는 죽간 《조정서》가 발굴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 , 조정(趙政) 시황제의 본명은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황제는 조씨이기 때문에 '영정'이 아니라 '조정'이 맞는 호칭이다. 전국시대에 성을 쓰는 건 여자였고, 남자는 씨를 썼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가는 미성 웅씨인데 초나라의 역대 왕들은 웅려, 웅장 등 씨를 썼지만 초나라 출신인 진나라의 선태후는 후궁 시절 미팔자('팔자'는 후궁의 직위)로 불렸다. 후세로 내려가며 성과 씨의 구분이 불분명해져 후세 사가들이 '영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
제호 | 始皇帝시황제 | Shi Huang Di |
신체 | 198cm | 120cm(허리 둘레) |
부모 | 부왕 장양왕, 모후 조희(趙姬) |
1. 개요
진나라의 6대 국왕이자 초대 황제. 진시황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진나라로 통일한 중국 최초의 통일 군주이다. 또한 스스로 황제라는 칭호까지 만들어 내어 중국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2. 일생
2.1. 출생 문제
呂不韋取邯鄲諸姬絕好善舞者與居,知有身。子楚從不韋飲,見而說之,因起為壽,請之。呂不韋怒,念業已破家為子楚,欲以釣奇,乃遂獻其姬。姬自匿有身,至大期時,生子政。
여불위는 한단 땅의 여자 중에 매우 아름다우며 춤을 잘 추는 여자를 얻어 함께 살다가 임신한 것을 알았다.영자초는 여불위와 술을 마시다가 그녀를 보고 반하여 일어나 장수를 기원하며 그녀를 청했다. 여불위는 처음에는 노했으나이미 영자초를 위해 집안이 무너져도 진기함을 낚으려는 일을 생각해 마침내 첩을 자초에게 바쳤다.그녀는 스스로 임신을 숨기고 만삭이 될 때에 이르러 아들 정(政)을 낳았다.
《사기》 <여불위 열전>
이처럼, 사마천의 《사기》 <여불위 열전>에서 시황제는 강태공(姜太公)의 후손이자 강성 여씨(姜姓呂氏)인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므로, 진시황은 영정이 아니라 강정(姜政) 혹은 여정(呂政)이 맞다.《사기》 <진시황 본기>에서는 시황제가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적고 있으나 생부라는 기록은 없으며, 위 여불위 열전에 진시황의 당시 출생상황을 상세히 적어놓은 것이다.그 외, 중국에서 공신력있고 권위있는 역사서인 반고의 <한서>, 배사의 <사기집해>,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에 모두 진시황은 여정이라고 적고 있는 것이 이에 대한 증거이다.
2.2. 왕위에 오르다
영자초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당시 진나라 왕이자 시황제의 증조부였던 소양왕이 붕어하였다. 효문왕(=안국군)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사흘만에 붕어하고 말았고[11] 이를 이어 영자초가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장양왕이었다. 그러나 장양왕도 3년 만에 붕어하는 바람에 정이 13살에 진나라의 왕이 된다.
2.3. 실권을 갖다
아직 진왕 정의 나이가 어렸던 탓에 당시 장양왕의 후원자로서 막대한 권력을 누렸던 승상 여불위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상방(相邦)[12]의 직위에 올랐으며, 왕으로부터 아버지와 같다는 '상보'(尙父)[13]의 칭호까지 얻었다. 이토록 강력한 권세를 얻은 여불위는 아직 나이가 어린 시황제 대신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때문에 진나라의 실권은 사실상 여불위의 손 안에 들어갔다.여불위가 상방의 지위를 얻은 이후부터 과거에 자신의 첩이었던 정(시황제)의 어머니 조 태후와 간통을 하였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 사실이 들통날까 두려워했으나 조 태후가 여불위를 사랑하여 늘 불러 정을 나누려 했으므로 결국 가짜 환관 노애(嫪毐)를 조 태후 옆에 붙여 시중들게 하였다. 노애는 정력이 출중해서 조 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로 조 태후는 과연 여불위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간통이 길어지면서 조 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두 명이나 낳고 말았는데 여기에 더하여 노애와 조 태후는 아이들을 감추어놓고 키우면서 정을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모략을 꾸몄다.그러나 정이 성인이 되었을 쯤에 이들의 행각은 곧 발각되었다. 당시 노애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움켜쥐고 있었던 덕택에 그의 성격은 점점 더 거만해졌다. 하루는 연회에서 술주정을 하다가 어느 신하가 그의 거만한 태도를 꾸짖자 도리어 "내가 왕의 계부인데 두려울 게 뭐냐?"는 말까지 듣고 말았다. 모욕을 당한 그 신하가 속을 터트리며 나가는 것을 본 정이 그의 분개한 표정을 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정은 노애를 몰래 조사하여 모든 진상을 파악하고 말았다.노애는 조 태후와의 불륜이 드러나자 최후의 발악을 하여 진나라 수도인 함양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정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를 진압하도록 명하였다. 정이 곧 창문군과 창평군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반격에 나서게 되니, 수도 내에서 교전까지 벌인 끝에 노애는 패하여 달아났다. 승리한 정은 조 태후가 노애와 간통하여 낳은 아이들, 즉 이부 동생들을 자루에 넣고 때려서 죽였으며, 달아난 노애를 붙잡아서 사지를 찢는 거열형에 처한 뒤 그 삼족을 멸하였다. 이후 자신의 어머니인 조 태후를 싫어하게 되어 그녀를 유폐하였다. 하지만 신하들의 간청으로 조 태후를 다시 함양의 왕궁으로 불러와 모셨다.[14]한편 정은 실권자인 여불위도 노애와 조 태후의 스캔들을 들어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불위를 따르는 신하들과 식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벼슬을 빼앗고 낙양으로 유배보내는 정도로 그쳤다. 그러나 한때 왕과 견줄 만한 세력을 지녔던 여불위의 권세는 무참히 꺾여버렸고 실의에 빠진 여불위는 곧 자살하였다. 결국 정은 노애와 조 태후 그리고 여불위까지 왕권을 위협하던 모든 세력을 짓눌러 나이 22세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비로소 친정 체제를 굳히게 된다.
2.4. 천하 통일을 이루다
정은 상방 여불위마저 제거하면서 마침내 진나라 최고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잠시나마 실추되었던 왕권을 회복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평생토록 보좌할 이사를 만났고, 그와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소양왕이 쌓은 기반으로 나머지 6국을 통일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정은 모사인 울료의 주장대로 6국의 대신들을 미리 매수하고, 6국 사이를 이간질했는데, 이는 실제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나라의 간신 곽개 등이 명장 이목의 활동을 저지하여 진군은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싸울 수 있었고, 6국이 서로를 믿지 않아서 도우려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대대적인 원정을 벌일 수 있도록 군비를 꾸준히 증강하여 함양 일대에 정국거라는 운하를 파고, 촉 지방에는 도강언을 건설하였다. 이로 인하여 안 그래도 부강한 진나라는 6국을 모두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과 병력을 갖게 되었다.이후 정은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여서 진나라와 인접했던 국가들, 즉 삼진(한•위•조)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기원전 230년에 한나라를 장군 등이 멸망시켰고, 그 다음에는 삼진 중에 가장 강했기에 동방 진출을 위해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던 조나라를 기원전 228년 장군 왕전이 수도 한단을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기원전 225년에는 왕전의 아들 왕분이 위나라를 수공으로 쳐서 대량을 함락시키고 멸망시켰다.그 뒤 이신의 주장대로 20만의 군사로 초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초나라의 명장 항연에게 격파당하자, 노장 왕전의 주장을 받아들여 진나라의 총전력인 60만 대군으로 다시 공격해 기원전 223년에 초나라를 멸망시켰다. 궁지에 몰린 항연은 결국 자결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기》에 의하면 당시 초나라의 군사도 40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로 보인다. 다만 진나라만큼의 중앙 집권력이 없었고, 각 귀족들의 사병이라는 성격이 강했기에 진나라에게 패배한 것으로 보여진다.한편 정의 조나라 볼모 시절 친구였고, 진나라의 볼모였다가 탈출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나라의 이런 정복 활동을 우려해서 형가를 보내어 정의 암살을 시도했다 실패하고, 격노한 정은 이를 빌미로 연나라를 맹공했다. 동북 변경인 요동까지 도망간 연나라 왕 연희는 아들 연단의 목을 잘라서 바치면서까지 용서를 빌었으나, 정은 거부하고 집요하게 추격해서 왕분이 연나라 왕을 사로잡아 서주 창건때부터 이어져 온 연나라는 기원전 222년에 완전히 멸망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221년에 제나라를 쳐서 왕분이 제나라 왕 전건의 항복을 받아내 멸망시켰다. 이리하여 재위 27년인 39살에, 정복을 시작한지 약 10년 만에 정은 광활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엄청난 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다만 엄밀히 말하면 시황제는 모든 중국을 통일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가 끝난 후에도 엄연히 위(衛)나라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스로 위(衛)를 야왕(野王)으로 옮겨놓고도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았고, 2대 황제인 호해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서민으로 만들면서 완전히 멸망시켜 버린다.
2.5. 제국의 통치
천하통일 이후 정은 기존의 전국 시절 군주의 호칭인 진왕(秦王)을 대체할 호칭을 찾았다. 이에 신하들은 '태황'이라는 호칭을 주장했으나 시황제는 그 주장을 물리고, 태황에서 '황'만을 남기고 신을 뜻하던 상고의 호칭 '제'를 붙여 황제란 칭호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진나라의 첫 황제, 즉 진 시황제가 되었다.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의 명령을 '교'(敎)가 아니라 조(詔)라고 바꾸고[15], 천자의 자칭을 종전의 '고'(孤)나 '과인'(寡人) 대신 짐(朕)으로 바꾸었다. 이전까지 '짐'은 고대 중국어의 1인칭 대명사 중 하나였는데[16] 시황제가 '짐'을 천자의 전유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시황제가 확립한 '조'와 '짐'의 용법은 후대 왕조에도 고스란히 이어졌다.또 시황제는 황제의 칭호를 도입하면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했다. 시황제가 천자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시호라는 게 군주가 사망한 후에 후대 왕이나 신하들이 생전의 공과 과를 평가하여 정하는 것이라서, 천자에게 시호를 올릴 경우 감히 아들(새로 즉위한 군주)이 아버지(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고, 감히 (살아 있는)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시황제는 이것이 굉장히 무엄하다고 생각해서 폐지했던 것이다.[17] 그래서 진나라의 황제는 다른 왕조와 달리 시황제(첫 번째 황제), 2세 황제(제2대 황제) 이런 식으로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천자에게 시호를 올리는 관습은 시황제의 아들 이후 두 번째 통일 왕조인 한나라때에 바로 부활했다.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시황제는 본격적인 제국 통치 사업에 몰두하면서 갖가지 개혁 정책을 내놓았다.우선적으로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이전에 주 왕조가 중국 대륙을 통치했을 때 사용한 봉건 제도와는 그 근본이 달랐다. 기존에 실시되던 봉건제도는 국가의 수장인 왕이 중앙을 통치하되, 그 외의 부분은 쪼개어서 동성인 희성 왕족이나 이성 공신들을 제후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형식으로써 중앙 권력에 비해 지방 정권이 더욱 비대해 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시황제는 이러한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 군현제는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전쟁을 거치며 사라졌지만 전한의 고제 시기에 군국제로 반쯤 부활하고, 개국 공신인 이성왕 숙청(고제), 외척 여씨의 난 진압(5대 한문제), 근친인 유씨 황족들이 일으킨 오초7국의 난 진압(6대 한경제) 등을 거쳐 7대 한무제 시기에 마침내 다시 정식으로 부활한다. 하지만 이후에는 좀 더 세분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는지 주-군-현 3단체계로 개편되고, 원나라 이전까지 그러니까 남송 시기까지 약 1,300년 가까이 중국의 행정제도가 되었다.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이때에 서적에 대한 탄압을 실시하여 진나라의 역사책과 법령집 외에 농사, 천문, 점술, 의학 등 실용 지식에 관련된 서적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서들을 없앨 것을 명령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학자들과의 충돌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분서갱유와 같은 참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8] 게다가, 이러한 사상 개혁은 부작용이 컸는데, 법가의 지나치게 엄격한 법률이 중국 전역의 통치에 쓰이게 되자 혹법에다가 지역적으로도 맞지 않은 법률과 형벌에 익숙하지 못했던 6국의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는 진나라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 진시황 사후 각지에서 반진 반란이 들불처럼 일어나게 되었다.또한 진시황은 온 나라가 들썩일 정도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수차례 벌이기도 하였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아방궁[19]과 여산릉을 건설하여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는 한편, 운하를 파서 수로를 통한 교역과 물품의 운송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언제나 중국에 위협이 되어온 흉노의 침략을 방어하고자 기존 7국의 성벽들을 보수해서 길다란 성벽을 건설했고, 진나라 멸망 이후에도 여러 나라들이 이 성벽을 보수, 증축, 신축하여 만리장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인하여 민심이 거칠어졌다.중국 통일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지의 나라마다 화폐와 서체가 달라 서로 간에 교류하는 데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여겼는지 천하의 화폐를 반량전으로, 서체를 소전체로 통일시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후로 물건의 치수나 길이를 재는 도량형과 수레바퀴의 폭 등도 하나로 통일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가 통일된 광대한 중국 전역의 통치를 원활히 하고, 그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특히 서체의 통일은 단순히 교류의 목적이 아니라 문서 기반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의 핵심이었다. 모든 보고를 오직 문서로만 하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이 관료제의 피라미드를 따라 전국에 전달되도록 하는데 공문서의 서체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2.6. 말년
이런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들은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또 폭압적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6국 백성들의 불만이 대단하였다. 우선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었던 법가 사상의 가혹하고 무거운 통치는 백성들, 특히 정복당한 6국의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따로 없었고, 이러한 까다로운 법률과 가혹한 형벌 때문에 민심은 피폐해져만 갔다. 당시 진나라의 신분제는 이십등작이었는데, 전장에서는 수급 하나마다 한 계급씩을 올려줬고, 죄인은 계급에 따라 감형이나 형벌을 계급 강등으로 교환할 수 있었다. 진나라의 백성들이야 지난 정복 전쟁에서 획득하였던 군공과 계급이 있었지만, 정복당한 6국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위해서는 공을 세운 바가 없었기에 당연히 작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6국의 백성들은 안 그래도 가혹한 제도와 형벌에 피지배민으로 그대로 노출되면서 차별받게 되었다.뿐만 아니라 진시황릉 건설, 흉노 정벌, 만리장성 건설 등등에 수십만명의 인력을 동원해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잦은 인력 동원과 과도한 세금 징수로 진승, 오광이나 유방의 경우처럼 민중의 엄청난 반발을 샀고, 이러한 점들이 진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농민 반란의 씨앗이 되었다. 이 때문에 황태자인 장남 부소마저 보다 못해 과도한 사업들을 중단하고 민생을 돌보라는 간언을 하였지만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부소에게 화를 내며 부소를 몽염이 있는 만리장성 건설 현장으로 추방해버리는 등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후대에 패업을 이룬 군주들 가운데 명군이라 불린 이들이 전란 직후 민심을 수습하고자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고, 무리한 사업을 줄여 국고를 절약하는 등 조치를 취한 것과 대비되는 것이다.
2.6.1. 수은 중독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진시황의 말년의 기행과 폭정, 폭군, 암군의 행태는 그가 중장년부터 꾸준히 복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수은 중독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다.수은에 장기간 노출될 시 우울증, 의욕 상실, 비정상적 졸음 등 정신적인 장애를 동반하며, 심할 경우 환각, 정신착란, 기억 상실로 지능이 극도로 떨어진다. 즉 뇌가 망가진다.따라서 '의욕적인 개혁군주, 유능한 정복군주'의 모습을 보이던 그의 전반의 치세와는 달리, 완전한 암군의 모습을 보여 황릉 건설에 천문학적인 국가예산을 쏟아붓고, 불로초를 찾아 다니느라 국고를 탕진하며[20], 각종 미신에 빠져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치세의 후반부는 그가 이미 중증 수은 중독에 걸려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2.6.2. 시황제의 미신 집착
(중략)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습니다. 구름을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합니다. 지금 주상께서 천하를 다스리시지만 욕심 없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머무시는 궁을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불사약을 구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이에 시황은 “짐이 진인을 흠모해왔다. 이제부터 짐이라 하지 않고 ‘진인’이라 부르겠다”라고 했다. 바로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00리 안에 있는 궁관 207곳을 구름 다리와 회랑으로 연결하고, 휘장, 종, 북, 미인들로 채우되 모두 등록된 각자의 부서에서 함부로 옮기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하여 거처하는 곳을 발설하는 자는 사형에 처했다.
《사기》 <진시황 본기>
말년에 들어 시황제는 미신에 집착하게 되어 대규모 국책 사업으로 국력을 낭비하기 시작한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진시황릉으로 <진시황 본기>에 따르면 즉위 직후부터 짓기 시작해서 통일 이후에는 70만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서, 수십년간 나라에는 조금도 도움이 안 되는 초대형 무덤을 만들었고, 결국 죽을 때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 외에도 진나라는 호 때문에 망한다는 '망진자, 호야'(亡秦者,胡也)라는 점쟁이의 점괘[21]를 믿고 수십만명을 동원해서 흉노를 정벌하고, 만리장성을 쌓아 국력을 낭비하고, 불로불사에 집착해서 사기꾼들에게 속아서 잡초를 사들이거나 고가인 경면주사[22]와 수은을 사는 등 국고를 낭비하고, 최후에는 홍의동자 꿈을 꾸고 꿈속의 홍의동자가 자신의 나라를 빼앗을 거라는 해몽을 믿고 순행길에 올랐다가 병사하는 등 미신에 푹 빠져 버린다.시황제의 미신에 대한 집착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 불로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가던 시황제는 죽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로불사에 집착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갖은 사기를 당하며 재정을 낭비했다. 특히 서복이라는 사기꾼이 동해 바다에 살고 있는 신선에게 불로초를 구해오겠다며 뻔히 보이는 사기를 쳤는데도 시황제는 그대로 속아 넘아가 서복에게 엄청난 양의 재물과 동남동녀들을 딸려보내 주었던 일화는 무척 유명하다. 제주도의 서귀포시의 이름도 시황제의 불로초를 찾아 온 서불의 전설에서 나온 지명. 이외에도 수많은 사기꾼들이 돈을 노리고 불로불사의 약을 구해오겠다면서 시황제에게 돈을 뜯어 달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시황제는 늘 속아넘어갔다.[23]진시황은 암살의 위험을 두려워해[24] 환관 조고가 없이는 누구도 자신을 만날 수 없게 했고, 그 탓에 조고의 권력은 비대해졌으며 진시황의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법률 체계를 만든 이사마저도 조고에게 고개를 숙이고 아첨해야할 정도로 조고는 진나라 권력의 핵심이 되었다.
2.7. 죽음과 사구정변
말년에 불로초 찾기 대모험과 같은 삽질만 하던 시황제는 자신이 제패한 중국의 천하를 둘러보고자 여러 차례에 걸쳐 전국 순행을 단행했으나, 다섯 번째 순행 도중에 병에 걸려 회복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기원전 210년 7월 사구(沙丘 : 오늘날 하북성(河北省) 평향현(平鄕縣) 부근)에서 병사하면서 약 50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했다.이에 대하여 《사기》에서는 한 가지 일화를 전한다. 평소에 미신에 대한 집착이 심했던 시황제가 낮잠을 자던 도중, 하늘에서 해가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곧바로 홍의동자와 청의동자가 나타나 서로 그 태양을 가지기 위해 싸웠는데, 홍의동자는 청의동자에게 수 차례 두들겨 맞아 쓰러져도 기어이 일어나 단 한 번의 일격으로 기어이 청의동자를 물리쳤다. 시황제가 홍의동자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나는 백제(百帝, 서쪽의 방위신)의 아들이며 이후 400년 황조의 기틀을 다질 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그리고 그의 사후 시황제의 유서에 의해 멀쩡한 장남 부소를 몽염과 같이 처형시키고, 무능하기 짝이 없었던 호해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바람에 나라가 작살나 버렸다. 이 때문인지 호해가 이사와 조고 등과 짜고 유서를 위조했다는 소문이 호해 재위 직후부터 돌아서, 진승·오광의 난 등 부소를 사칭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 이후 공식화되어서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해서 정설이 되었다. 위에서도 말한 이야기지만 문제는 그 측근들이 설사 정말로 유서를 위조했다 하더라도 대체 그들이 유서를 위조했는지 여부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흔히 떠돌던 낭설을, 2세 황제의 바보짓 때문에 시황제 같은 사람이 정말 2세 황제를 후계로 삼았을 리가 없다고 여긴 사마천이 믿어 버렸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사마천이 이 기사의 출처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또다른 설로는, 사마천이 책을 쓰던 시기에는 정말 모두가 저 밀담에 대해서 당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따로 출전을 적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고, 혹은 이사가 형을 받으면서 모든 걸 불었다는 의견도 있다. 단지 사마천이 따로 적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아들 호해와 관련되어 한 가지 민간 설화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진나라는 호에게 멸망할 것이다(망진자호야, 亡秦者胡也)'라는 점괘가 사실은 이민족(胡)이 아니라 호해에게 망하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오랑캐에 의해 멸망할 줄 알아서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되려 나라는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는 무능한 아들인 호해에게 멸망당했다는 것이다.
3. 평가
3.1. 최초의 중국 통일
비록 시황제가 말년의 폭정으로 기껏 통일해 놓은 진나라를 크게 약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했으나, 최초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놓은 시황제의 업적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외형적인 통일을 넘어서서 서체(서체 통일은 한나라 때 완성)와 도량형, 화폐, 법 등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으면서 문화가 이질적으로 발전한 각지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역할도 하였다. 특히 시황제 시기에 확립한 통일제국의 통치 제도와 행정체계 등 근간 시스템은 한나라에서 문자 그대로 복붙 수준으로 계승되어 근대화 이전까지 2,000년이 넘도록 모든 중화문명권 국가들에 적용되었다. 즉 동아시아 문명권 전체의 국가시스템을 확립한 시초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현재 중국에서는 굉장히 띄워 주고 있는데, 특히 최근에 들어 중국 내의 소수 민족들과 한족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도 잘 어울려 거의 국가 차원으로 띄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긍정적인 평가는 역사적으로도 있었고, 중국 정부의 평가도 폭군으로서의 실정은 인정하는 등 찬양일색은 아니므로 '이게 다 중국 정부 덕이다'라는 식의 인식은 어느 정도 과장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무리가 뻔한 토목공사를 강행한 것과 불로초를 구하려고 벌인 기행들은 절대로 변호가 되지 않는다.황하 유역, 장강 유역, 나아가 서부 내륙과 난링, 우이산맥 이남 남중국 일원까지 모조리 통일하여 단일국가 하에 놓이게 한 첫 인물이 시황제임을 상기하면, 그가 중국이라는 하나의 국가 개념, 문명권 개념이 태동함에 끼친 영향은 실로 가공할 만한 것이라 평해도 그리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또한 계속 언급되듯 시황제의 업적이 아무 것도 없던 변방의 후진국을 혼자의 힘만으로 발전시킨 후 여섯 나라를 모두 무너뜨리고 천하 통일을 17년 만에 했다고 포장하는 건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다 된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거라고 평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 소왕 대에 완성된 전국시대 진나라의 우위는 풍전등화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진 소왕은 족히 40년에 걸쳐 외척인 위염에게 휘둘린 꼭두각시였으며, 그 끝에 간신히 외척으로부터 권한을 되찾긴 했지만 위염파였던 백기까지 깔쌈하게 숙청한 덕분에 수도까지 털었던 조나라가 다시금 국가를 바로세우고, 덕분에 확장에 제동이 걸린 채 백기의 후임을 찾지 못하고 연속된 후계자들의 죽음으로 주춤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나라는 강성한 것이 맞지만, 내부적으로 우환이 많았다.만약 진시황이 평범한 왕이었다면 그대로 진나라가 쇠락기에 접어들 수도 있었던 게 즉위 당시 상황이며, 설령 통일이 그토록 쉬운 일이었다 한들 밥상에 숟가락 얹기도 힘들 멍청이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물며, 당시 시황제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적들이나 항연 등등의 인물들이 존재했다. 이신과 왕전의 기용 면에서 보더라도 군사적 안목과 재능은 별로 뛰어나지 않더라도 군주로서의 아량과 그릇은 참되어 이신의 대패에 상심하지 않고 바로 백전 노장 왕전을 기용하며[25] 이례적으로 패배한 이신을 재신임하여 연나라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우도록 다시 쓴 정도로 보아 군주로서 결단력과 사리판단은 탁월했던 것 같다. 또한 한나라에서 진나라의 국력을 쇠하게 할 목적으로 파견했을 것이라 의심되는 정국을 능력이 있다 여겨 벌하지 않고, 그대로 기용하여 함양 일대 위수에 운하를 파서 수운과 농업을 크게 증진시키기도 했다. 이때 개간한 대규모 경작지는 그대로 6국 토벌에 사용되었다.추가로 시황제와 진나라의 업적은 '중화'라는 관념을 물리적으로 실현해내었다는 데 있다. 하나의 중화, 하나의 문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토와 통치의 단일화는 필수이다. 하나의 문명권이라는 개념을 심어주지는 못 했지만, 하나의 영토가 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중화의 단초를 제시한 군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시황제의 통일은 하나된 중화를 이루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전제 조건인 하나된 영토를 최초로 달성했다는 측면에서, 한나라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황제의 진나라가 중화 문명의 형성에 상당 부분 기여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진나라 이후 일어선 초나라와 한나라는 제후들을 분봉하면서 진나라의 체제를 부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의 창업군주인 유방과 항우도 내심 시황제의 위세를 부러워 했었고,[26] 시황제를 워너비로 여겼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부러워한 위세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통일제국의 군주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하여 일시적으로 분봉제를 시행했던 한나라도 결국은 점차적으로 이성•동성 분봉왕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으로 갔고, 항우의 분봉 역시 끝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즉 한나라, 초나라가 분봉제를 채택한 건 옛날이 좋아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구세대들의 반발을 줄이기 위해 과도기적인 성격이 크다.[27][28]
3.2. 통치체계 확립
진시황이 최종적으로 완성해 낸 법가적 국가 운영 방략과 그에 기반한 율령제, 관료제는, 유교적 이념과 함께 후일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 베트남의 한자문화권 국가들에게 한 전형성을 구성하는데 있어 필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그가 적어도 역사의 한 대목에서 기념비적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란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물론 효공이래 진왕조 선대의 유산이라고 볼수도 있으나 적어도 새로운 황제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은 시황제가 결정했음이 사서에도 강조된다.흔히 동아시아 문명권을 유교 문화권으로 칭하지만 실제 통치 체계의 큰 구조와 세세한 부분까지 통일 진나라의 통치제도를 그대로 따라갔다. 물론 선대의 업적을 물려받은 것이긴 하나 통일 이후 어전회의에서 봉건제를 주장한 신하가 《사기》에 남아 있고 진나라를 멸한 후 잠시나마 천하의 주인이 된 항우는 구시대적 질서인 봉건제를 재건했다. 유방도 천하 통일 이후 한나라의 제도를 정할 때도 무심코 봉건제로 갈뻔했다. 즉 당대 사람들은 새로운 천자의 통치제도로 군현제보단 주나라식 봉건제를 먼저 떠올렸고 익숙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사의 간언을 수용하고 전면적인 군현제의 실시를 밀어붙인 장본인이 시황제이다. 적어도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다.
3.3. 만리장성 건축
중국 북쪽에는 흉노족들이 살았는데 이들의 땅은 농사짓기 힘든 곳이어서 추수할 때가 되면 진나라로 쳐들어와서 곡식들을 약탈했다. 그래서 이들을 막기위해 장군 몽염을 시켜 흉노를 토벌하게 하였으며 진나라 북쪽의 성벽들을 이어붙여서 만리장성을 건축하게 됐고, 덕분에 흉노족들을 막을 수 있었다.
3.4. 도로 건설
시황제는 수도인 함양을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연결되는 치도(馳道)와 군사 전용 도로인 직도(直道)라는 도로를 만들었다. 치도 덕분에 황제의 명령이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되고, 큰 도로인 만큼 안전해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안전하게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었으며 시황제가 치도를 이용하여 순행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란이 일어나면 직도를 통해 군대를 빨리 보낼 수 있었다.
3.5. 유의 사항
진을 엎어버리고 세운 게 한나라인 셈이니 한나라에서 편찬된 《사기》에는 전 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분위기가 강했고, 진나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 또한 많은 편이다.[29] 게다가 은근히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이 있는 《사기》인만큼, <진시황 본기> 자체가 한무제를 어느 정도 빗댄 게 아니냐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실제로 한무제와 진시황은 닮은 부분이 상당히 많다. 만리장성 짓고 궁궐 짓고 봉선하고 전쟁하고... 진시황이 까이는 행보를 무제도 다 했다. 그것도 몇 가지는 훨씬 더 큰 스케일로.또한 과거 유교를 국교로 숭상한 중국과 한국의 왕조들, 그리고 유학자들은 진시황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언급이 나올 때마다 거의 폭군의 대명사 수준으로 까인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시황제부터가 유교를 매우 싫어했으며 그 유학자들 본인을 마구 죽였기 때문이다. 분서갱유같은 초유의 일까지 저질렀던 것이 기록에 남아있는 판이라 표면적으로라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사정은 서양도 비슷한데 크리스트교가 지배적이었던 유럽에서는 전근대까지만 해도 기독교를 박해한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한 평가가 시궁창이었다.전국시대는 하루가 멀다하고 10만명 단위로 전쟁이 벌어지고 한 전투에서 수만명씩 죽어나가는 생지옥이었다. 전국 7웅 전체가 병영사회로 국가 총동원령이 상시 유지되는 체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일 진나라의 통치가 가혹하긴 하나 전국시대보다 특별히 더 가혹한 통치였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물론 법가에 기반한 진나라의 법이 그만큼 엄하고 가혹했긴 하나 이것을 진의 멸망원인으로 꼽으려면 가장 오랜기간 혹정에 노출된 진나라 내부에서부터 반란이 끊임이 없었어야하고 통일은 커녕 효공이나 혜문왕대에 망했어야 말이된다. 오히려 진나라 만큼의 전격적인 법치까진 아니어도 전국시대 말기로 갈수록 전란이 심화되면서 모든 나라가 법가적 통치를 조금씩 수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대외 원정과 궁궐 신축 등의 행보는 신생 통일왕조 중에 안 한 왕조를 찾기 힘들 정도기도 하고. 특히 아방궁은 폭정의 대표적인 예지만 고고학적으로 실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진나라에게 흡수된 타국의 국민들은 갑자기 접하게 된 진나라의 법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특히 강력하고 전격적인 중앙집권으로 인한 지역의 이권상실은 토착 지배세력에겐 용납이 불가능했을 것이다.[30]물론 통일 이후 진시황의 통치에 문제가 많았던 것임은 확실하다. 어디까지나 그 통치의 문제가 《사기》의 기록처럼 고의로 작정하고 나라 말아먹으려는 듯한 폭군 개인의 폭주 때문인지 아니면 통일제국을 위한 통합정책의 결점 혹은 한계 때문이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답은 둘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또 진나라 본토인 관중의 오리지널 진나라 백성들은 큰 반발이 없었다. 오히려 영성 조씨 황실에 대한 지지가 강했기에 자영이 조고를 축출할 기회를 얻었고, 그를 우호적으로 대우해준 유방은 옛 진나라를 원활히 접수할 수 있었다. 반진 봉기도 6국의 정체성과 토착세력의 기반이 온전히 남은 상태에서 바로 어제까지 원수였던 진나라에 대한 반발심이 있었을 지역에서만 (실제로 그 근원이 변방 이민족과 관련이 깊어 전국시대 말기까지도 진은 초와 함께 반쯤 오랑캐 취급을 받으면서 중원인들에게 상당한 적대감을 받았고 정복전쟁 과정에서 적대감은 심화되었다.) 봉기가 일어났으니 단순히 폭정 탓으로만 돌리기엔 무리가 있다.[31] 결과적으로 진나라를 멸한 것도 6국 지배층의 후예들의 대표인 항우였고, 유방 말년과 오초칠국의 난을 보면 정치를 잘했다는 전한도 통일 이후 중앙집권 과정에서 나라가 망할뻔한 위기가 몇 번 있었다.가혹한 법치에 대해서도 수호지 진간, 2년 율령 등 진과 전한 초의 법전 및 실제 법 집행 기록을 비교해 보면 덕으로 유도리있게 시행해서 성공했다는 전한의 법치도 상당히 빠르게 진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엄격해진다. (여후 시절인 2년 율령에 드러난 법조문은 진의 법률을 거의 그대로 복붙했고 실제 법 집행에 있어서도 법률에 정해진 형벌을 진나라 대비 두드러지게 유연하거나 관대하게 집행한 판례들을 찾기 어렵다. 굳이 찾자면 신체를 훼손하는 육형 중 하나를 폐지하는 등의 변화가 있긴 하나 그것 뿐, 육형의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있어 크게 자비로워졌다고 보긴 어렵다. 형벌보다는 행정적인 면에서 좀 더 진나라가 FM에 가깝게 빡빡하게 관리한 것 같긴 하다. 수호지 진간 내용을 직접 보면 진시황 당대의 법 집행이 오히려 지금 시각으로도 꽤 융통성 있는 부분이 있어 놀랄 것이다.) 진승•오광의 난의 시발점 이야기에서 지각이 진의 법률에선 사형이 아닌 벌금형이고 심지어 중간에 도망가다 잡힌 자도 태형으로 끝내는 등의 조문도 있어 사서의 기록과 실제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진나라의 법과 제도가 상충하는 면도 많다. 특히 형벌은 (부국강병을 추구해서 그런지) 속설과 다르게 노동력을 상실하는 사형이나 육형은 시대를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고 대신 벌금형과 노역형이 대부분이다. 대신 상당히 집요하게 집행한 기록이 잘 남아있다.정론은 "시황제는 무리한 정치를 자행하여 멸망의 단초를 만들었다."이고 이것이 역사적 실체와 한참 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6국 유민들 입장에서 폭정으로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매우 많았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폭정으로 거론되는 예의 상당수는 통일왕조에서 통합을 위해 으레 추진하는 사업들인 경우도 많다. 새로운 궁궐, 대외원정, 도로 건설, 만리장성 등은 후대에도 통일 후 반복된 사업들이고 봉선의식과 순행 등은 당시 관념으로 새로운 천하질서를 위해 정치적으로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이 경우는 성군이나 명군으로 평가받는 군주들도 시행한 사례가 많고 권장되기도 해서, 이런 사업들로 소모한 국력을 정량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다분히 결과론적인 평가이기도 하다. 모든 통일왕조에서 제국의 통합이 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진의 통일은 원시 부족시절부터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던 완전히 별개의 중국을 최초로 하나의 정치체로 만드는 일이었고 그를 위해 당대의 관념을 뛰어넘는 대규모 개혁까지 시도했기 때문에 후대의 통일왕조들 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궁궐을 필요 이상으로 여럿 짓고 거대한 능원을 조성하는 등 명백한 실책도 많다. 그러나 당대에 6국 유민들에게 폭정으로 받아들여질만한 "무리한 정치"와 각종 정책을 단순히 시황제 개인의 포악함으로 돌리기보다는 수백년간 분열되어있던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 제국이 제국의 통합이라는 당면 과제를 다루는 방법과 그 한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3.6. 폭정
통일 이후를 보면 진나라 사람들을 제외한 6국의 후예들은 토목 공사, 군역, 가혹한 세금 때문에 삶이 비참해진다. 그리고 통일 이전까지만 해도 제법 능력있게 통치를 하던 시황제 본인은, 중국 최초의 통일을 자화자찬하며 교만해졌고 나중에가면 쓸데없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불로초를 찾아 헤메고 수은을 복용한 것.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은 관리와 제후왕들이 조세법이 애매모호한 걸 툭하면 악용해서 사람들을 혹사시킨다면서 이 부분은 예외적으로 아예 뜯어고쳐 버렸다. 온갖 이유로 세금을 깎고 요역을 막았는데도 나라 운영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국고는 갈수록 부유해지는 걸 보면 시황제 시기의 세금이 얼마나 불합리했는지 상상이 안갈 지경.사실 진나라가 가혹할 정도로 민중들을 쥐어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데 시황제가 밀어 붙였던 법가 사상의 '법은 함부로 바뀌어선 안된다'였기 때문이다.[32] 그로 인해 현실과 맞지않는 법률들까지 고치지 않고 계속 이어간 게 치명적이었다. 현대의 법도 안정성 때문에 그리 쉽게 바꾸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법을 맹신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까지 가도록 하진 않는다. 특히 법은 사회를 안정되고 질서있게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지 법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나 시황제의 진나라는 법 그 자체를 지키는 게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주의해야 할 것이 통일 후 무작정 법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냥 법가사상에서 함부로 바꾸는 것을 지양했으니 하는 추측에 불과하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법치주의를 표방하면서 안정성과 신뢰성을 위해 법을 손바닥 뒤집듯 가벼히 바꿔대면 안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는 현대 법치주의에도 적용되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말꼬리잡아 비난을 위한 비난을 하는 느낌이 강하지 않은가? 또 천하통일후 시행한 수많은 제도 개혁은 이러한 주장과 모순이 아닌가? 개혁이 법과 무관하게 진행했다는 얘기가 되는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렵다.결국 통일 이후 진나라는 전국 7웅 시대와 중국의 첫 통일 제국이라는 새롭게 바뀐 상황과 현실에 대해 과거 전국 7웅 시절의 법가 정책을 고스란히 강요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쉽게 말해서 전시 체제 때나 통하던 극단적인 법률을 평시에까지 적용시킨 것이다. 가혹한 법이라도 전쟁으로 사람 목숨이 마구 날아가던 시대에는 불평을 하지 못했지만,[33] 사회가 안정기에 들어서고 사람들의 행동양식이 변하였는데도 법의 잣대에 걸리면 가차없이 목이 날아가는 잔인한 통치는 끊임없이 불만들을 가중시켰고, 그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민중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었다.[35][36] 결국 중국 최초의 통일이란 대업을 성취해냈음에도 진나라는 3대 만에 허망할 정도로 순식간에 쪼그라들고 멸망해버렸다. 자신을 시황제로 칭하며 이후의 진나라 황제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를 칭할 것을 기대었건만... 이세 황제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멸망하고 만다.시황제를 찬양하는 측에서는 진나라의 멸망 원인을 죄다 2대 황제인 이세 황제에게 몰아붙이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세 황제의 암정이 큰 비중을 차지했긴 했지만 이러한 진 제국의 혼란의 단초를 제공한 것에는 시황제가 일정 부분 기여했다. 진승의 난은 호해 즉위와 거의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사후대처 외에 반란의 원인 자체는 진시황의 책임이라고 볼 수밖에 없기 때문. 더욱이 뭐가 어떻게 된건지 진은 중앙에서 동원할 군사도 15년 사이에 증발해버렸다고 한다. 계포 말로는 흉노 원정 탓이라고 한다.[37]
3.7. 잘못된 후계자 선정
시황제는 진 제국을 3대 13년만에 망하게 하는 폭탄을 여러개 남기긴 했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게 바로 후계 문제였다.일단 여러 의혹이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시황제와 그 태자인 부소 사이의 관계가 너무나도 절묘하게 좋지 않았다. 다른 게 아니라, 사구정변의 참사를 고려하더라도 시황제가 부소를 만리장성 건설 건으로 변방에 보낸 건 순수 100% 시황제 본인의 결단이었기 때문. 물론 부소의 옆에 있었던 게 당시 진나라에서도 손꼽히던 장수였던 몽염이지만, 결과적으로 순방 도중 죽음을 맞이해 후계 문제에 차질이 생긴 건 전적으로 시황제 본인의 탓이었기 때문이다.안 그래도 천하통일 후 무리한 문화 통일과 진나라의 엄벌주의 탓에 전체적으로 불만이 만연했는데[38], 그런 시황제의 장남이었던 부소는 백성 친화적인 태도로 인해 구 진나라 영토 내에서는 물론 타국의 영토에서도 상당한 인망을 쌓고 있었다.[39]허나 이런 부소가 변방에 머무를 적 시황제가 죽어버린 탓에 이사와 조고 등으로 대표되는 간신들에 의해 호해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 결과는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물론 시황제 시대 진나라는 당시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통일 왕조였기에 후대의 왕조와 비교하면 어색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허나, 통일 거의 바로 다음 세대에 온갖 반란과 난에 직면한 건 이후 수많은 통일 왕조의 견본이 된 한나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 및 통일 이후 수많은 난을 직면한 후대의 국가들이 곧바로 무너지지 않았던 건 중앙 정부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어지간한 명장이 나오지 않는 한 부소가 황명을 받자마자 자결하지 않았다 해도, 그리고 설령 그 탓에 진나라가 내전 따위로 인해 둘로 나뉘었다 해도 사기에서 말하길 과도한 숙청 탓에 조정이 텅 비었다 일컬어지는 호해의 정부보다는 굳건할 수밖에 없었다.즉, 순행 도중 급사한 건 시황제 개인에게 있어서도 불행이었지만 그 순행이나 죽기 직전에서야 황태자를 지명한 행동 등은 모두 시황제 본인의 책임인 게 사실이다. 하물며 사구정변으로 인한 후계 구도의 부정확함은 이후 호해 정부의 정통성을 물어뜯는 약점이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런 책임에서 당사자였던 진시황이 책임을 피하기란 어려운 법이다.[40]
3.8. 하나의 중국은 한(漢) 제국
분명 시황제는 중국이라는 영토를 통일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시황제 본인이 바라던 하나된 중국을 이루지는 못했다. 시황제 생전에는 여전히 각국에 원래 국가로의 독립을 원하던 반란분자들이 쎄고 빠졌고 내부로는 폭정과 후계자 문제, 인재 부족 등 온갖 일들로 곪아있었다. 결국 시황제가 그리도 바라던 진정으로 하나된 중국은 한고제의 전한이 되어서야 이룰 수 있게 되었고 고작 100년도 못간, 3대에서 끝난 통일 진나라는 어디까지나 분리된 중국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는 점만 의의가 있지 문화통일이나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실패한 거나 다름없다.[41]명백하게 중국은 한(漢) 제국의 400여 년 통치를 겪으면서 하나의 중국의 개념과 정신이 형성되었다. 3대 만에 망한 진나라에서 하나의 문화 개념과 하나의 중국이란 개념을 심어줄 수는 없었다.시황제의 중국 통일이 이후 한 제국이 하나의 중국을 형성하는데 밑거름들 중 하나가 된 것은 분명하나 시황제의 중국 통일은 이후 진나라가 빠른 속도로 무너진 데다 무엇보다도 항우가 18제후왕들을 분봉하면서 진의 통일이 무색하게 중국을 또다시 갈라 버림으로써 한 제국의 하나의 중국의 형성에서 진나라의 영토 통일의 의미는 상당부분 퇴색되어 버린 지 오래다.[42] 결국 한 제국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여러 제후왕들과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중국을 두 번째로 통일하게 된다.[43]요약하자면 진나라는 씨족공동체에서 출발한 분권적 구시대를 박살내며 통합된 중국의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주었고 그 하나의 중국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시스템의 적절한 운영법을 더하여 완성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며 사회•문화적 통합을 이루어낸 건 온전히 한나라의 공이다.진나라는 한나라의 좋은 반면교사였다. 진 제국은 한 제국에게 있어서 국가 운영 방략과 율령제, 관료제, 국가 이념 성립, 경영 전략에서 좋은 반면교사[44]이자 참고 대상이었다. 게다가 한나라는 국가 운영 방략으로 법가를 시행하면서 정신적 이념으로는 황로사상을 택하여 실제 운용은 느슨하고 융통성있게 하는 등, 3대 만에 망해버린 진나라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비판하며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과진론》이다.
3.9. 법가 사상의 맹신
시황제는 법가를 신봉하다 못해 맹신해 통일 후에 불편함 등을 이유로 도량형과 화폐 등을 통일, 개선하면서도 정작 진나라 사회의 근간이 되었던 법령을 고치지 않고 통일된 중국 전역에 계속 적용, 지속시키는 돌이킬 수 없는 실정을 저질렀다. 효공 시절부터 내려온 진나라의 법가적 통치는 진나라의 강성한 국력의 기반이었다. 법가 사상이 진나라에게 천하 통일을 안겨주었으니 곧바로 개선한다는 것은 그만큼 유능한 개혁가가 출현해야 가능했을 것이니 이건 비단 시황제만의 문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황제는 이러한 법령을 고치지 못했으며 결국 적절한 개혁을 하지 못한 진나라는 외부의 적이 더 이상 없음에도 내부의 문제점들로 인하여 급속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45]진나라의 법가는 엄격하지만 이십등작으로 부여된 작위에 따라 팔다리를 자르거나 사형, 혹독한 유형지로 끌려가는 신체적 처벌 대신 자신이 얻은 작위가 강등되는 등으로 처벌이 감형받거나 용서받고 면제받을 방법이 있었기에 실제 진나라 백성들이 법전에 적힌 혹형들을 그대로 받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작위가 실제로 공을 세워서 올라간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무거운 처벌이다.그런데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됐는데 진나라 백성들이야 진나라가 6국과 벌인 전쟁 등에서 자주 징병되면서 올라간 작위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복 당한 6국 백성들은 작위가 있을 리 없으니 가혹한 형벌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46]사실 진나라 멸망의 시작을 알린 진승·오광의 난이 발생한 원인도 기일 내에 당도하지 못하면 바로 목이 베이는 진나라의 엄격한 법률 때문이었다[반대증거]. 본디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건조한 중국 내륙 지역이었으므로 태업을 하지 않는다면 대체로 정해진 기일 내에 도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중국 전역이 진나라가 아니고 특히 중국 동부는 폭우가 여름철에 자주 오기 때문에 이런 지역에서 진나라 방식의 법률을 그대로 적용하는 건 그냥 죽으라는 것과 차이가 없다. 앞에서 말한 진승과 오광의 난도 여름철이면 장마가 빈번하게 벌어지는 오늘날 안후이성 지역[48]에서 음력 7월 여름 장마 도중에 벌어진다.이후 그 유방의 한나라도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통치의 수단은 계속 법치에 중점을 뒀는데, 한 제국은 유교를 근간 이념으로 삼고, 법가는 제국을 운영하는 제도로서 삼았다. 한 제국은 법가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도 《과진론》이라 하여 진나라의 과실을 분명하게 따졌다. 게다가 한 제국 초기엔 도가가 상당히 흥하는 등 유가, 도가[49], 법가가 서로 어우러진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한(漢)나라가 이처럼 법가 하나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며 매달렸던 진나라와 달리 좋은 건 받아들이고 잘못된 것은 철저히 버리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있어서는 한 고제 특유의 유연한 태도도 있었다. 이는 최초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도 3대 만에 망해버린 진 제국과 하나의 중국, 하나의 문화권을 태동시킨 400년 역사의 한(漢) 제국의 명백한 차이점이다.
"내가 난세를 만나 진나라가 학문을 금하자, 스스로 기뻐하여 책을 읽는 것이 유익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임금이 되고 난 뒤로부터 비로소 때때로 책을 살펴보았는데 글 쓴 사람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이에 비추어 내가 옛날에 행동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니 옳지 않은 일이 많았다."[50]
육생이 옛날 《시경》과 《서경》을 때때로 인용하여 유세하자 고조가 꾸짖었다.“이 어르신(乃公)은[51]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시서(詩書) 같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육생이 대답했다.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나를 위해 진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잃었고, 내가 어떻게 천하를 얻었으며, 과거에 나라를 얻은 일, 잃어버렸던 일들을 글을 지어 올려주시오.”- 《사기》 <역생 육가 열전>
실제로도 한나라는 법률과 관료 체제 자체는 법가에 준해서 만들며, 국가 통치 이념과 법의 적용에 대해서는 도가(황로사상)의 사상을 받아들여서 조치에 경중과 가감을 두었다. 이렇게 하면 법가의 장점을 활용한 체계적인 국가 체제를 만들 수 있음과 동시에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모으고, 법이 규정하지 않은 예외 상황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민심을 다독일 수 있었다. 이는 결국 시황제의 폭정에 대한 반발로 인해 3대 만에 멸망한 진 제국과 달리 한 제국이 400여 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4. 분서갱유
분서갱유라는 초유의 사건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여, 전근대의 유학자들에게는 가히 만세의 적 취급을 당해왔다.[52]
5. 용모
사마천의 《사기》에서 울료는 시황제의 용모를 가리켜 '코가 높고 눈은 길게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같으며 은혜를 베풀 줄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를 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덤으로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같은 자"라고 혹평한다.중국 근대의 학자 곽말약은 그의 저서 《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시황제는 초상화와 달리 선천적인 병으로 인해 어렸을 때의 외모가 추했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꺼렸으며, 특히 화려함을 좋아했던 어머니에게 거부당한 것이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은, 소질 있는 아이가 타고난 외모와 안 좋은 환경 때문에 비뚤어진 전형적 케이스"라고 주장했다. 더불어 어린 나이에 갑자기 왕이 된 탓에 제대로 된 인간 관계를 배우지 못했을 텐데, 이게 그의 정신적인 성장에 큰 영향을 줘서 다른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 게 아닌가 그래서 뭔가 이루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 중국 통일을 이루거나, 만리장성 축조 등 큰 규모의 건축을 계획하게 된 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시황제의 비정상적인 외모와 말년에 보인 정신착란 증세가 사실 심각한 뇌 손상이 가져온 결과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수은은 소량 섭취시 일시적으로 피부가 팽팽해지는 효과가 있어 시황제는 이를 불로장생 약으로 믿게 되어 매일같이 수은을 먹고, 발라서 결국 수은 중독에 이르렀으며, 거기에 수은은 금단 증상까지 있어서 결국 시황제는 수은을 더 많이, 더 자주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데 이런 수은 중독에 과로까지 겹쳤는데도 50대까지 살았다.[53] 결국 죽어서도 진시황릉에 수은으로 만든 강을 만들어 넣었다고 한다.[54] 현재 진시황릉의 토지 수은 농도가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실제로 다량의 수은이 묻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6. 암살 위협
10년 만에 전국의 여섯 국가를 멸망시키고, 가혹한 통치를 한 탓에 과거 6국 백성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았고 수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나라 형가의 암살미수와 형가의 친구 고점리, 훗날 한나라 개국 공신이 되는 젊은 시절 장량 등이 있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영웅 (부제 : 천하의 시작)"을 보면 이 암살 시도를 모티브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시황제는 유난히 암살 위협을 많이 받은 황제였고 이 때문에 불로불사에 더 집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7. 여담
시호와 묘호가 없는 황제로 나름 유명하다. 흔히 불리는 '시황제'는 시호가 아니라 '첫 번째 황제'라는 의미일 뿐이다. 시황제가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면서 시호를 폐지했다. (죽은) 황제에게 시호를 올리는 건 (그 다음 군주가 된)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죽은) 군주에 대해 논하여 적당한 글자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에(시법), 철권 독재자인 시황제의 눈에는 매우 건방진 관행으로 보였다. 그래서 아예 시호를 없애버리고 황제의 대수만 표기하게 했다. 시황제는 말 그대로 첫 번째 황제라는 뜻. 호해가 '2세 황제'라고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55] 시황제의 시호가 없는 탓에, 선진·양한[56](先秦兩漢) 시대 탁월한 군사적 업적을 이룬 시황제와 한무제를 함께 일컬을 때 특이하게도 진황한무(秦皇漢武)라고 표현한다.[57] 어차피 진나라의 2세 황제 호해는 황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치세를 보냈고, 재위 기간도 짧아 따로 언급할 일이 적고 그 다음 군주인 자영 역시 한 달 조금 넘게 재위한 데다 아예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왕을 칭했다.[58] 따라서 시황제가 사실상 진나라의 유일한 황제라고 볼 수도 있으므로 '진황'(秦皇)이 딱히 틀린 표현은 아니다. 물론 '진황한무' 대신 진시한무(秦始漢武)라고 쓴 예도 옛 문헌을 검색해 보면 발견되긴 하지만 '진황한무'가 더 일반적으로 쓰인다.
이상하게도 시황제의 황후나 후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황후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도 당시로서는 특이한 일이었을텐데 그런 기록도 없다. 《사기집해》에는 이사가 17형을 폐하고, 호해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유명한 부소와 호해 이외에도 아들이 많았던 것이니 당연히 황후와 상당수의 후궁을 거느렸을 것이다. 다만 《사기》 <진시황 본기>의 진시황릉에 대한 내용 중 이런 서술이 있다.
이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들 중, 자식이 없는 자를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 명령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하니,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二世曰 "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 皆令從死, 死者甚眾)
• 여기서 선제는 당연히 시황제를 가리킨다. 그러나 진시황릉이나 그 인근에서도 황후나 후궁의 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후궁의 시신이 매장되었을 가능성, 또 하나는 저 기록에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다.
시황제는 절대 권력 확립에 집착해 모든 사무를 직접 처리했는데, 하루에 처리한 공문이 죽간으로 120근 가량이었다고 한다. 여불위의 섭정과 어머니의 쿠데타까지 겪은 경험 탓으로 추정된다.
폭군인 것 치고는 여불위를 제외하면 공신 숙청이 없는 편인데, 의외로 진시황은 의심이 많았어도 숙청 자체는 그리 쉽게 단행하지 않은 편이었다. 무엇보다, 초기엔 여불위를 날려버린 본인의 정치력이 있고 후기엔 전국시대를 통일했다는 업적이 있으니 반기를 들 신하들도 존재하지 않았다. 신하들 관련 문제가 두드러진 건 실제로 시황제 사후부터였다.
현대 한국에서는 시진핑을 비꼬는 말로도 쓰인다. 주석 집권 후 지배력을 강화하고 연임 제한을 폐지하면서 자신을 마오쩌둥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헌법에 명시하는 바람에 '시'씨 성의 '황제', 또는 '진' 짜 '시' 진핑 '황' 제가 되었다는 뜻. 이 표현은 연합뉴스에서도 쓰인 바 있다.[59]
혐중들에게는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지금처럼 강대한 중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한 점 때문에 만악의 근원 취급을 받기도 한다. 특히 중국 화남 지역 전체가 중국 통일 이전엔 모두 베트남 문화권이었다고 주장하는 베트남판 환빠들에게는 그야말로 증오의 대상이다.[60] 2020년에는 시진핑 정권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산 방치로 전세계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중국 본토를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 시황제의 중국 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
정약용은 재물이나 땅문서를 믿는 게 부질없는 짓이라고 할 때 진시황 이야기를 했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쵸소카베 모리치카 등으로 유명한 센고쿠 시대의 쵸소카베 가문이 진시황의 후손을 자칭했다.[61][62]
진시황은 우리나라로 치면 연산군과 비슷한 면이 많다. 둘 다 재위 초중반에 영명하고 합리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재위 후반에 천하통일과 절대적인 권력을 얻은 후 타락했다는 점과 기반을 다지기는커녕 정신줄을 놓아 가렴주구와 토목공사와 사치 향략에 빠져 자신이 일구어낸 절대적인 권력도 반란으로 인해 무너져 파멸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유능한 정복군주이면서 말년에 암군으로 타락했다는 점에서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와도 비슷한데 초반에 유능한 정복군주였다가 말년에 지나친 광신으로 피지배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하여 사후에 제국이 분열됐다는 점과 비슷하다. 일본으로 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도 비슷한데, 전국시대의 혼란에 시달리던 자국을 통일한 점은 높이 평가받지만 이후에 엄청나게 타락하여 결국 자기 가문의 정권(진나라/도요토미 정권)이 본인 사후 빨리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여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으로 평가되는 점이 유사하다.
- 첨언 -
[1] 정확한 날짜는 기록되지 않았다. 당시 진나라에서 썼던 전욱력(顓頊曆)을 기준으로 이 달은 그레고리력 1월 27일부터 2월 24일까지 총 29일간이었다.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장양왕은) 시황을 진 소왕 48년 정월에 한단에서 낳았다. 生始皇以秦昭王四十八年正月, 生於邯鄲.
[2] 『사기』의 원문은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라 하여 음력 7월 병인일에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는 병인일이 없었고 6월, 8월, 9월에 있었다. 9월 10일이라는 날짜는 병인일을 7월이 아닌 8월의 것으로 본 다음 그것을 양력으로 변환한 것이다. 중문 위키백과에서는 홍범오행전의 "六月乙丑"을 근거로 사망일을 7월 11일로 기록하였다.
[3] 음력 5월 26일 병오. 이 날에 장양왕이 죽었다.
[4] 『사기』 권6 「진시황 본기」 "(재위) 26년, (중략) 왕이 말하기를 "태 자는 떼고 황 자를 취하고, 상고의 제라는 이름을 가져다 '황제'라 부르고, 나머지는 논의와 같이 하라." 하였다. 제를 내려 "좋다."라 명하였다. 二十六年, … 王曰 "去泰, 著皇, 采上古帝位號, 號曰皇帝. 他如議." 制曰, "可."
[5] 진나라 왕성. 여불위의 아들이라면 성은 강(姜)혹은 여(呂)이다.
[6] 《사기》에 진나라의 선조가 영(嬴)성 조(趙)씨라고 기록되어 있다.
[7] 《사기집해》는 서광의 주석을 인용해 시황제의 이름이 “정(正)”으로 된 판본이 있다고 하면서, 송충의 주석에 따라 정월(正月, 음력 1월)에 태어나 '정'으로 지었다고 해석했다. 고대에는 '정'(正)과 '정'(政)이 하나의 글자로 혼용되었다. 일례로 '정'(正)과 '정'(政)의 동자(同字)적, 다의어적 성격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는데 《논어》 <안연편>에 나온다. 대부 계씨(계손씨) 집안의 7대 영주였던 계강자가 정치란 무엇이냐고 묻자 “정(政)은 곧 정(正)이다”(政者, 正也), 즉 “정치(政)란 바르게 하는 것(正)이다”라고 말한 것. 시황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 소수들은 원래 이름이 '정'(政)이고 '정'(政)의 앞 글자를 따서 아명을 '정'(正)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8] 상술했듯 진시황의 이름은 政인지 正인지 논란이 있다. 일설로만 전해지는 이름이지만, 진짜로 시황제를 '조정'(趙正)이라고 부르는 죽간 《조정서》가 발굴되면서 신빙성이 높아졌다.
[9] 시황제의 본명은 '영정'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시황제는 조씨이기 때문에 '영정'이 아니라 '조정'이 맞는 호칭이다. 전국시대에 성을 쓰는 건 여자였고, 남자는 씨를 썼다. 예를 들어 초나라 왕가는 미성 웅씨인데 초나라의 역대 왕들은 웅려, 웅장 등 씨를 썼지만 초나라 출신인 진나라의 선태후는 후궁 시절 미팔자('팔자'는 후궁의 직위)로 불렸다. 후세로 내려가며 성과 씨의 구분이 불분명해져 후세 사가들이 '영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0] 출처1출처2
[11] 소양왕이 죽은 지 사흘 뒤에 바로 사망한 건 아니고,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 그 사이에 추모 기간이 몇 달 있었다.
[12] 병마용갱에서 출토된 무기에는 '상방'(相邦)으로 표기되어 있다. 후대에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한고제 유방의 이름인 방(邦)의 피휘를 하기 위해서 '상국'(相國)이라고 표기했다.
[13] 여기서는 父를 '보'라고 읽는다.
[14] 여담으로 이 사건 때문에 시황제는 어머니보다 할머니인 화양부인과 더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15] 황제의 명령을 가리키는 또 다른 글자 중 하나인 '칙'(勅 또는 敕)은 이때 도입되지 않았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16] 그래서 시황제 이전 시대의 글을 인용한 것을 보면 보통 사람이 스스로를 '짐'이라고 부르는 예들을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17] 다 《사기》 <진시황 본기>에 나오는 얘기다.
[18] 시황제는 분서갱유로 악명을 떨쳤는데, 이후의 중국 역대 왕조에서도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사상과 서적에 대한 탄압은 자주 벌어졌다. 특히 청나라 때에 만주족에 대한 비판을 엄중히 다스린 문자의 옥이 유명하다. 또, 이 시절 기록이 전해져오지 않는 것은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는 오히려 함양을 불태운 항우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19] 단 고고학적 발굴 결과 추정 터만 있고 건물의 흔적이 없어 실존하지 않았다는 게 주류 의견이다. 《사기》에 언급된 규모도 500*100 미터로 황궁치고는 매우 작다.
[20] 장성 건설과 흉노 정벌은 그나마 외적을 막는다는 명분이라도 있지 황릉 건설에 대규모 예산을 쏟아부은것은 명백한 실책이다.
[21] 이 호 자를 오랑캐 말고 2대 황제 호해라고 해석한다면 적중한 예언이 되는데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선 진시황이 저게 호해를 뜻하는 줄 몰랐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22] 경면주사는 수은화합물로 도장의 인주와 부적을 그릴 때 사용한다. 굉장히 고가라서 지금도 금보다 비싼 값을 자랑한다.
[23] 당시를 다루는 소설에서는, 무덤을 만든 이유가 불로불사와 연관된 또 다른 미신의 일환이라는 설정을 쓰기도 한다.
[24] 실제로 암살시도를 3번이나 받았다.
[25] 물론 시황제의 의심을 푸는 왕전의 처세술도 기억해야 한다.
[26] 항우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했고, 고제도 "사내라면 저 정도는 해 봐야지!" 라고 말했다. 결국 둘 다 시황제의 지위를 부러워했다는 의미다.
[27] 근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역으로 진나라가 허무하게 망한 이유는 통일 직후 나라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 무리하게 기득권을 빼앗는 중앙집권을 추진한 시황제 탓이 된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의 상호작용으로 역사를 보는 시각에선 단순히 폭군으로 모는 것보다 이 쪽이 더 설득력이 있긴 하다. 후대에 폭군으로 몰리는 군주 중에도 지방호족세력을 제압하려다가 역으로 당하고 먹칠당한 경우가 많다.
[28] 심지어 한나라도 진나라욕받이+초한대전으로 구세력 초토화+분봉제 3중 안전망을 갖추고도 유방당대에도 반란에 시달리고 중앙집권 강화하다가 오초칠국의 난으로 나라가 망할뻔했다.
[29] 아방궁 기록만해도 기초공사만 하다 끝난 궁을 완공된 모습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극비인 진시황릉의 내부를 직접 본듯이 생생히 묘사하는데, 사마천의 고의라기보다는 진시황 사후 천하가 난리통에 빠지면서 부정확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후 반진봉기로 시작한 전한에서 진에 불리한쪽의 이야기가 주로 보존되거나 확대-재생산 될수 밖에없어 사기에 채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0] 전국시대에 펼쳐진 여러 성공한 변법들의 공통점이 처음엔 온나라가 싫어하다가 10년 20년 후 익숙해지고 효과가 보이니 나중에는 도리어 좋아했다는 기록이 빠지질 않는다. (상앙뿐만 아니라 명재상으로 유명하고 유가에서도 인정받는 자산, 이회 등도 마찬가지) 종실의 권위가 잘 먹히는 본국에서도 단계별로 시행해서 수십 년간 공들여 정착시키면서도 주도자인 상앙이 죽어야 했을 만큼 어려운 개혁을 어제까지 타국이었던 곳을 강제로 병탄하자마자 하루아침에 밀어붙인 개혁행보는 그 내용이 아닌 전개 과정이 크나큰 무리수였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제3세계에 쳐들어가 민주주의를 심으려다가 폭망한 미국의 흑역사들을 보면...) 그래서 진을 멸한 한고조 유방은 삼장이라고 하여 법을 간편화하고 부드럽게 해 인심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31] 하지만 약법 3장을 약속하며 혹법을 완화할 것을 약속한 유방에게 감격하여 그를 왕으로 모실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이들에게도 진나라에 대한 불만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유방측의 기록) 특히 6국의 후예들이 이끈 다른 국가의 세력들과 달리 진나라 쪽은 그럴 만한 사람들이 족족 조고에 의해 제거당하거나 도망치는 바람에 마땅한 구심점이 없었던 점도 있다. 그러나 약법삼장은 전시에 행정력을 아직 갖추지 못한 군벌이 임시로 취한 것이고 그마저도 금새 조항이 늘어났다. 정작 천하를 본격적으로 운영하는 입장이 된 전한의 법은 진의 그것과 거의 같은 마이너 업데이트였다. 행정법 같은 부분 뿐만 아니라 폭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있는 형법마저도 거의 복붙이었다.
[32] 법가에서는 법을 자주 바꾸면 사람들에게 혼란만 줄 수 있기에 함부로 바꿔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33] 특히 진나라의 경우 전국 7웅 중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해 오랑캐(서융)과 맞닥뜨리고 있어[34] 진나라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는 서융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도 있었을 정도로 전쟁이 많았다.
[34] 이해가 힘들겠다면 진나라가 위치한 곳은 옛 서주 영역이었다.
[35]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이 진나라의 엄격하다못해 가혹한 법률들이 후대 왕조의 개창자인 유방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사수정장이었던 유방이 죄수들을 여산에서 노역시키기 위해 데려가고 있었는데 당시 워낙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다 노역하다 죽기 싫었던 죄수들이 하나둘 도망가자 유방 역시 어차피 여산에 도착해봤자 티오가 안 맞는 것을 추궁당해 처형당할텐데 그럴 바에야 그냥 가지 말자(...)는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주변 사람들을 모아 진나라 현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다.
[36] 그러나 실제 시황제 대의 법률과 행정기록이 발굴되면서 사소한 죄로 툭하만 목이날아간다는 둥의 기록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때문에 사기의 진나라관련 기록은 다소 걸러보아야 한다. 진말의 대혼란과 항우의 함양 방화 및 학살로 날라간 공식기록과 사라진 증인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한 기록이 많을 수밖에 없다.
[37] 몽염이 흉노를 대파했고 자결 직전까지 30만 대군을 이끌고 있었으니 이건 아니고, 진승의 군대가 관중에 육박하자 그제서야 징발할 시간이 없다는 기록과 숙손통의 일화를 보면 중앙군 문제는 호해만의 잘못일 수 있다. 멸망 직후 겨우 4년간의 초한대전에서 한나라의 물량을 보면 이때도 미리미리 대응했으면 죄수를 데려다 쓸 일은 없었을 듯하다.
[38] 물론 진시황도 바보는 아니라 울료 등의 등용을 통해 상앙 당시의 엄격함에 비하면 다소 순화된 법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그렇다 쳐도 엄벌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던 건 변하지 않는다.
[39] 당장 진승·오광의 난의 주동자인 진승과 오광 또한 자신들을 항우의 할아버지이자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 그리고 부소라 자칭했던 걸 고려하면 부소의 이름이 당시 민중들에게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 단, 조정서 등을 참고로 호해를 후계자로 지목한 게 시황제라는 식의 이야기는 부당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조정서는 그 이름부터 조나라에서 태어난 조나라의 씨 영정이라 시황제가 스스로를 조정이라 자칭하며, 다른 이들도 그를 조정이라 칭하는 문서이기 때문. 조정서가 역사적 가치가 있다 평가받는 건 시황제를 진왕이라 칭할 정도의 세력, 나아가서는 당시 문화를 보여주는 문헌으로서 가치가 있다는 거지 종래의 사구정변을 뒤엎는 새로이 출토된 사실 따위로 주목받는 게 아니다. 사구정변은 비록 어색한 점이 없잖아 있는 설이고,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모로 의심을 받았던 게 사실이지만 그 사구정변을 뒤엎을 수 있는, 검증 가능한 사서가 존재하지 않는 한 수상쩍다는 이유로 무조건 그 내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까놓고 말해서, 현재 사학계에서 조정서에 저런 내용이 나온다는 이유로 진시황이 호해를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설을 진지하게 주장하는 역사학자는 단 한 명도 없다.
[41] 다만 한나라의 거의 모든 제도는 진나라를 베낀수준이므로 과하게 폄하할 필요는 없다. 시황제의 의도는 아니지만 진이 구세력 조지면서 욕은 대신먹어주고 망한 이후 난리통속에서 지방 구세력이 작살나면서 통합과정의 난이도를 확 낮춰지도록 판을 깔아준 공로도 있다(!)
[42] 사실 진나라가 한나라에게 기여한 것은 영토보다도 오히려 행정 제도들이다. 한 제국의 행정을 조직하고 기틀을 정리한 한 제국의 초대 승상이었던 소하부터가 진나라의 지방행정을 조직/실행해오던 관리 출신이었다.
[43] 한 제국과 전투를 치른 제후들이 전부 항우의 임명을 받은 제후들은 아니다. 이후 항우의 분봉에 불만을 품고 그가 임명한 제후왕을 살해한 후 자신이 정권을 잡은 제후들도 생겨났기 때문.
[44] 중원을 완벽하게 통일한 한 제국에서 이후 2대 황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건국 황제인 한 고제가 여후의 아들인 혜제 대신 개인적으로 총애하는 척희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으려 하자, 한 제국의 예법, 국가 이념을 정비하는 데 큰 업적을 세운 숙손통이 장자 승계의 원칙을 어겨 나라를 망하게 한 실패 사례로 시황제를 언급했다. 유방이 소하를 처벌하기 위해 시황제와 이사의 관계를 거론할 때도 나라를 망하게 한 인간들을 뭐하러 본받냐고 비판당했다. 시황제로서는 실로 굴욕.
[45] 그런데 진나라의 제도가 《상군서》나 《한비자》에서 서술하는 법가를 완전히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는게 함정.
[46] 최근 고고학적 발견은 본 문단과 반대되는 정황을 암시하는데, 2000년대 발굴된 시황 25년 ~ 이세 2년까지의 행정문서인 《리야 진간》의 일부 기록에 따르면 6국의 작위를 진나라의 상응하는 작위로 인정한 정황이 보인다. 리야는 본래 초나라 지역인데 '형 불경 아무개' 형태의 문구가 발견된 것이다. '형'은 곧 '초'의 피휘(장양왕 영자초)이므로 '초 불경'이 되는데 진나라의 '불경'에 해당되는 초나라 작위를 보유했던 아무개란 뜻이다. 공문서에서 멸국으로 무효화된 작위를 진나라의 대응 작위로 맞추어 표기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진나라에서도 6국 유민에 대한 유화책으로 작위를 인정해주었다는 해석이 있다. 다만 《리야 진간》은 20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고, 2009년에야 독문이 공개되었다. 계속 연구가 진행중이므로 널리 받아들여진 정설로 보기에는 이르다. 적어도 한번은 통일 기념으로 한 등급씩 작위를 올려준 기록이 있긴 하다.
[반대증거] 당대의 기록인 《수호지 진간》에 따르면 이런 경우에 인솔하는 관리에게 국가에 배상하는 의미로 지각한 날짜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조항만 있다. 《진률》 전체가 발굴된건 아니라 지각하면 사형시키는 조항이 없다고 단정은 못하지만 인솔 책임자는 노동력 제공을 늦게한 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늦게나마 도착한 "노동력"을 죽여 없애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특히 일종의 판례모음에는 (지각보다 죄질이 훨씬 나쁜) 노역에 노쇼하거나 도망한자에 대한 처벌이 태형이란 예시도 있기때문에 사형은 말도 안된다
[48] 진승 일당이 발이 묶여 반란을 일으킨 대택향은 오늘날 안후이성의 쑤저우다.
[49] 유방의 건국 공신 장량이 도가에 귀의한 것이 대표적 사례. 다만 진나라도 도가의 영향이 상당히 짙었고 유가는 한나라에서도 무제이전엔 진나라 에서처럼 마이너였다. 사상의 트렌드라는게 그리 쉽게 변하진 않는다.
[50] 진나라가 법가의 실용성을 주장하며 유학을 탄압하자 유방 본인이 '쓰잘데기 없는 거 치워버리니까 좋네!'라고 했다가,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 다시 배우게 되자 과거 자기의 행동을 반성하였다는 이야기.
[51] 이게 잘못 쓴 것이 아니라 유방의 말버릇이 사실상 이랬다. 평민 출신으로 올라왔고 그 출신 면모를 별다른 거리낌 없이 드러낸 유방답게 어투도 일반 군주와는 조금 달랐다.
[52] 다만 이 시대의 책들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 이유는 시황제의 분서갱유보다 항우의 역할이 더 컸다는 말도 있다.
[53] 증조 할아버지 소양왕이 70살 넘게 산 걸 보아, 수은 안 마셨으면 꽤 장수했을 가능성이 높다.
[54] 출처 : 《사기》 <진시황 본기>.
[55] 그러나 진나라가 멸망한 후 전한 시대에 시호를 부활시키게 된다. 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멸망 이후 쓰이지 않았던 묘호까지 부활시켰다. 황제라는 칭호는 이미 유용성이 입증됐다고 봐서 그대로 사용했다. 사실 진나라를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통일 제국에서 다시 전국시대로 회귀하려고 했던 복고주의자 항우도 초의제를 세우는 등 황제 칭호를 버리지는 않았다.
[56] 중국의 전한과 후한 두 한나라를 통틀어 이르는 말.
[57]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대의 황제인 한무제를 까기 위해 의도적으로 진시황에 한무제를 덧씌운 정황이 있는 것도 이러한 표현의 원인이 된다. 실제로 《사기》의 진시황의 폭정 묘사는 한무제가 일으킨 대규모 토목공사와 비슷하다.
[58] 다만 후대인들이 영자영을 3세 황제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긴 하다.
[59] 하지만 시황제의 시는 비로소 시(始, 중국식 발음은 권설음이 들어간 스<shǐ>)자인 반면, 시진핑의 시(Xí)는 익힐 습(번체 習/간체 习)자의 중국 발음이다.
[60] 당연하지만 이런 베트남 극우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중국 남부 지역은 현대 베트남인의 선조 격인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 민족만 살았던 게 아니라, 묘족이 속한 몽몐어족 계통 민족들과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민족들, 그리고 태국인과 라오인, 좡족의 조상 민족인 크라다이어족 계통의 민족들이 마구 뒤섞여서 살았다. 그래서 백번 양보해서 베트남 환빠들 말대로 중국 남부 전체가 베트남계 왕조의 치하에 있었다고 쳐도, 실상은 중앙집권화가 전혀 안 되어서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각자 다른 나라인양 따로국밥으로 노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61] 실제로 모토치카는 서장을 작성할 때 미나모토, 타이라 같이 자신의 성씨를 쓰는 곳에 하타(秦)라고 기입했다.
[62] 실제로는 헤이안 시대 하타 요시토시(秦能俊)라는 인물이 그 선대가 하사받은 시나노의 땅에서 세력을 뻗치고 있었는데 1156년 호겐의 난(保元の乱) 때 패배한 세력에 소속해있었기 때문에 토사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제설로 1221년의 죠큐의 난(承久の乱) 이후로 도망쳐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 그렇게 토사로 도망쳐온 요시토시는 토사에는 얼마 존재하지 않는 평야 지역이자 중심지역이나 다름없는 나가오카 군에 정착하게 되었고 자신의 성을 '소카베'(宗我部)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옆동네 카미 군(香美郡)에도 자신들의 성을 '소카베'라고 쓰는 일족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를 구분하기 위해 나가오카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쵸소카베(長宗我部), 카미에 거주하는 소카베 일족을 코소카베(香宗我部)라 부르게 되었다.